2006년 09월 12일
우리들의 아가서
우리들의 아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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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1. 14.
1961. 4. 13. 이곳은 하루에 한 번, 보통 12시경에 우편 배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오후 5시까지 편지가 오질 않습니다. 수지, 생각해봐요. 내가 어떻게 이 다섯 시간을 기다렸을지. 포기하고 있는데 친구가 편지를 갖다 주었습니다. 얼마나 행복했을지 상상이갑니까? 열여덟의 여대생과 스물셋의 군인 조르고 졸라 오래된 흑백사진으로 처음 마주한 두 분의 청년 시절은 참 환하고도 푸르렀습니다. 야간대학마저 집안 사정으로 그만둔 채 말단 공무원으로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형형한 눈빛의 청년 김인수, 이대 간호학과에 입학한 봄꽃보다 환하고 깨끗한 여대생 김수지가 만난 것은 스물셋과 열여덟, 영어성경공부 모임에서였답니다. 사진을 들고 보니 그토록 다를 수 있을까 싶습니다. 두 사람의 처지, 성품… 그러나 어느새 두 분의 얼굴은 강가의 조약돌처럼 서로 맨들맨들 닮아있습니다. 30여 년이란 세월의 장강을 함께 흐르며 지나온 수많은 골짜기와 거친 폭포가 두 분의 얼굴을 둥굴게 빚어놓았던 가 봅니다. 무엇이라 부를까로 시작해 서로의 가슴을 오간 2천4백여 통의 편지들, 오래되어 빛깔이 바랜 그 편지를 들추는 두 분의 얼굴엔 설핏 엷은 홍조가 스쳤습니다. 좀체 보여 주지 않으시려던 두 분은 막상 꺼내온 편지들을 들고는 이건 당신이 유학가는 배 안에서 보낸 거죠? 아, 기숙사에서 보낸 편지도 있을텐데하며 젊은 연인들처럼 편지를 뒤척이십니다. 조심스레 편지들을 넘기는데 문득 그림같은 것이 지나갑니다. 자세히보니 방안의 도면이었습니다. 먼저 유학길을 떠난 김인수 교수님이 선실안의 풍경을 도면으로 그려 보낸 것이었습니다. 방안의 가구까지도 그려둔 도면 한 귀퉁이에 빨간 볼펜으로 점을 찍고는 지금 여기에 앉아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하고 적어두셨더군요. 그 도면을 들여다 보며 함께 웃었습니다. 갈피 갈피, 작은 엽서며 마른 나뭇잎 하나까지 담아 둔 여섯 권의 편지묶음마다 김인수 교수님은 표지를 만들고 제목을 달아두셨습니다. 30여 년 전 구하기도 힘들었을 레터링 세트로 1961년, 1962년, 1963년 한 자 한자, 한 권 한 권 글씨를 세겨 넣은 그 책. 어떤 것보다 소중한 두 분의 보물을 두 분은 우리들의 아가서라 부르셨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유일한 사랑,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처럼 사랑이 성스럼움일 수 있는 그러한 한 세계를 생을 통해 느끼신 거겠지요. 몇 해 전 그 두터운 편지들의 일부를 엮어 「우리들의 아가서」라는 제목으로 출간하기도 하셨습니다. 다르다는 것은 도우라는 것 김 김 화곡동에 은행융자를 얻어 우리가 함께 상의하며 설계해 지은 20평짜리 우리집은 대궐이었습니다. 그곳에다 당신과 내 이름이 적힌 문패를 세로로 나란히 달아놓고 보니 옆으로 읽어도 우리 이름이요. 밑으로 읽어도 우리 이름임을 발견하고 웃었던 일 기억납니까? 우리 두 사람의 이름을 딴 두 아이(인과 수), 시부모님과 세 명의 시누이와 시동생까지 열 식구가 함께 단란한 가정을 만들어 사랑을 나누며 살았던 일은 지금도 주마등 같이 내 머리를 스쳐지나갑니다. 처음 만남으로부터 38년, 부부로 함께 살아온 32년. 어느새 시간이란 단어로 담을 수 없을 만큼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약수동 사글세 방에서 철제 캐비닛 한 개, 헌 책상 하나, 이부자리만을 가지고 시작한 신혼생활, 작은 손수레에 단촐한 살림과 연탄 몇 개를 싣고 서울시내를 가로지르며 이사를 다니면서도, 버스요금이 없어서 둘이 함께 찬송 부르며 서대문에서 연희동까지 걸어 오면서도 한 번도 초라하다거나 궁핍하게 느끼지 않으셨답니다. 오히려 힘겨운 건 가난이 아니라 두 사람의 차이였다고, 6년 동안 나눈 수천 통의 편지로 서로가 입 속의 혀처럼 익숙하다 생각했건만 막상 결혼한 뒤 발견하게 된 사고방식과 생활습관의 차이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되뇌이십니다. 우리 집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면 입었던 옷을 그대로 벗어두고 몸만 빠져 나가요. 그럼 내가 치우죠. 그래놓고 밤 늦게 돌아와선 내 옷 어쨌느냐고 찾아요. 그럼 또 갖다주죠. 저는 가위 어디 있어요? 하면 어, 책상 두 번째 서랍 왼쪽 앞줄에하고 말할 정도로 정돈하는 성격이죠. 그러니 왜 갈등이 없었겠어요. … 다르다는 건 도우라는 뜻이예요. 사실 다르다는 것이 힘든 게 아니예요 받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힘든 거죠. 서로의 부족함을 크게 느낄수록 사랑과는 멀어지죠. 부부는 상대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 주라고 만난 사람들이예요. 그렇게 부대끼고 갈등하는 삶 속에서 두 분은 바라는 배필이 아니라 돕는 배필이 부부라는 하나님의 숨은 그림을 찾아내셨다 합니다. 유학, 미국행전 결혼을 하고 아내가 이대 전임강사를 시작했을 때, 남편은 야간대학에 입학을 했답니다. 고졸의 남편대학에서 강의하는 부인. 사람들은 두 사람의 정신적 격차가 너무 커 결혼생활이 어려울 거라고 수근대기도 했지만 남편은 한 순간도 열등감을 느낀 적이 없답니다. 나와 결혼하려거든 모든 것을 버리고 돌아와달라는 한 장의 편지에 홀홀단신으로 유학과 장학금을 포기하고 돌아온 아내의 사랑이 남편의 마음을 빛나게 했던 것이겠지요. 주위에 그렇듯 좋은 조건의 신랑감들이 많았건만 왜 나와 결혼했느냐는 남편의 물음에 아내는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당신과 결혼하면 도울일이 많을 것 같아서요. 이미 너무 큰 학력 차가 있었건만 남편은 아내에게 공부를 마저 마치라고 독려했답니다. 남자는 평생 공부할 수 있지만 여자는 출산과 양육 때문에 점점 공부하기가 힘드니 먼저 공부를 마치라고. 그렇게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의로 가난과 차이를 이기고 조율하며 살아온 결혼생활 속에서 두 사람은 쉬임없는 강처럼 더 깊고 너른 삶으로 함께 흘러왔습니다. 남편이 유학을 떠난 건 서른 네 살, 스물아홉의 결혼 후 야간대학을 마치고 미국정부의 장학금으로 타고 시작한 공부였습니다. 열두 살 이후 공부만 해보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노라는 한 마디에 가슴이 아련했습니다. 지독하게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며 독학한 영어, 그 영어로 미국정부의 장학금을 타기까지 남모르게 건너온 숱한 어려움이 얼마나 깊고 컸을까요. 그래도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시며 자주 기적이라는 단어를 쓰십니다. 그 기적은 인디애나 대학에서 3년간 강의를 맡는 조건으로 박사과정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2년 7개월만에 박사과정을 마치고 MIT에 취직이 되기까지 아내는 불평이나 원망 없이 묵묵히 살림을 꾸려나갔습니다. 두 아이를 데리고 간 미국생활은 참 가파른 일상이었습니다. 낯선 땅에서 두 아이를 키운다는 일, 자신의 공부를 뒤로 미루고 남편을 돕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겠지요. 석사과정을 시작해 정신없던 유학 초기. 힘겨운 간호사 일에 디스크로 고생하던 아내를 위해 남편은 매일 저녁 두 아이를 목욕시켜 주었답니다. 밤근무로 아내가 낮에 잠들어야 할 때는 두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이나 놀이터에 데리고 나가 놀아주기도 했다지요. 서른넷의 나이에 유학길에 올라 박사학위를 마치기까지 5년여의 시간. 두 아이를 기르며 자신의 공부를 뒤로 미룬 채 남편을 돕는 아내를 향한 뼈 속 깊은 고마움을 남편은 그렇게라도 전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박사학위가 끝나자 마자 남편이 찾아간 곳은 간호학의 명문이라는 보스톤 대학이었습니다. 아내의 입학원서를 들고 개강을 앞둔 8월, 이미 2월에 박사 학위 입학생 심사가 모두 끝난 대학의 문을 두드린 것입니다. 남편의 간절함 때문이었을까요? 개강일 오전, 아내는 면접을 치뤘고 그 자리에서 입학허가를 받았습니다. 게다가 주정부가 주는 전액 장학금까지 받아 그 날 오후에 등록을 마치고 바로 그날부터 공부를 시작하였다 합니다. 2년 8개월만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간호학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을 때 신기하게도 그 장학금 제도 또한 때를 같이하여 폐지되었다 하시더군요. 그 이야기를 하시며 기적이라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그 기적이라는 말 뒤에는 쉬이 남발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 그득히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부모의 발자국에서 삶을 배우는 아이들
결혼할 사람을 찾았다고 아버지께 이야기하는 딸에게 단 두 가지를 물으셨답니다. 바른 신앙을 지닌 사람이니? 착한 사람이니? 네가 보기에…. 잠시 후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yes라는 딸의 음성에, 그렇다면 네 판단을 믿으마 하시고는 두말없이 결혼을 허락하셨답니다. 네가 보기에… 그 한마디 말에 실린 딸을 향한 웅숭깊은 신뢰, 그것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가르친, 오래고 긴 세월을 준비하고 단련한 아버지만이 줄 수 있는 혼수였을 것입니다. 딸의 결혼식도 아들의 결혼식도 작고 단촐했습니다. 양가 하객 50명씩과 자녀들의 친구 50명, 모두 150명만을 초청해 올린 작은 결혼식. 축의금은 거절하고 간단한 식사 대접으로 식을 마치셨다 합니다. 예단이나 예물은 물론 없었지요. 혼함도, 폐백도 없이 하나님 앞에서 가족과 친구들의 깊은 사랑만으로 올려진 검소하고 단아한 결혼식 이야기는 오래도록 주위 사람들을 향그럽게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조근조근 들려 주시는 교수님 얼굴 위로 문득 30여 년 전 두 분이 함께 올린 오래된 결혼식 풍경이 겹쳐졌습니다. 형편도 여의치 않았지만 양가 부모님의 도움없이 검소하고 단촐하게 치르기로 작정한 결혼식 날, 단벌 양복을 세탁해 입고 결혼식장인 교회로 가는 버스 속에서 그만 장인어른을 만나셨답니다. 버스요금을 대신 내려는 사위를 향해 그만두게 하고 언짢게 돌아서시는 장인어른의 뒷모습에 어리는 서운함. 폐물은커녕 새 옷 한 벌 못 갖춘 큰 사위를 맞아야 했던 부모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면 아직도 죄송하시다구요…. 하지만 가난 때문만은 아니셨던 것 같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두 분 수입의 절반 이상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삶에 쓰시는 두 분 삶을 보면 말이지요. 청빈한 삶의 자리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는데 거실의 조명을 켜며 이건 특별히 손님이 오셔서 켜드리는 거예요. 어때요 훨씬 분위기가 좋죠?하십니다. 불쑥 찾아간 저를 위해 특별히 조명등을 켜 주시는 세심함도 훈훈했지만 그 불빛 하나도 당신들을 위해서는 쓰지 않으시는 삶의 검약이 불빛보다 아름다웠습니다. 집 안에 계실 때도 두터운 옷을 입고 조금은 춥게 지내신다는 두 분의 주머니는 늘 이웃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우리 아내에게 살림을 맡겼다가 두 달만에 내가 맡았어요. 도무지 살림이 안됐으니까요. 지금도 월급을 집에 못가져 오는 사람이니… 뭐 오죽했겠어요. 주머니에 있으면 남 주느라 남는 것이 없는 사람인데. 하지만 밉지 않죠. 자신을 위한 허영이 없는 사람이니까요. 나눔의 뿌리가 일상 깊이 내려 있는 두 분의 검약한 살림살이. 간소하고 단순한 삶 없는 나눔은 또다른 소비일 수도 있겠지요. 문득 제 서툰 살림은 어떠한가 하여 혼자 가만히 부끄러워졌습니다. 저녁해 같은 당신 꽃을 버린 나무가 열매를 얻듯 두 분의 삶이 버리고 버리며 맺어온 열매는 그리 작지 않습니다. 거실 한 켠의 가족사진속에는 수, 인, 지인, 사위, 며느리, 돌박이 손자까지 어느새 대가족이 되어버린 가족들이 두 분의 삶도 곧 노년의 초입임을 환히 웃으며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열여덟의 여대생이었던 아내는 그렇게 소원했던 간호사가 되었습니다. 포기했던 박사과정까지 마치고 이화대학의 교수가, 진선미 상담실을 통해 마음앓는 이들을 돌보는 치유자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힘겨운 갱년기를 조심스럽게 넘어선 결곱게 늙어가는 아내가 되었습니다. 늦깎이로 공부를 시작했던 남편은 고려대학에서 경영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그 치밀하고 빈틈없던 성격에도 아내가 어질러놓은 방을 슬쩍 눈감아 줄줄도 아는 넉넉함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두 분 생의 가장 큰 열매는 아직도 서로 사랑을 고백하는 시들지 않는 사랑인 듯합니다. 대학에서도 가정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는 삶의 기술, 그것이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데 절실한 것인가를 삶의 구비구비에서 느꼈던 두 분은 스스로가 삶의 기술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 두 사람이 함께 만든 기독교가정사역원의 부부학교와 부모학교를 통해 수천 쌍의 사람들에게 삶의 기술을, 사랑을 삶으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오고 있습니다. 노년의 초입에서 그날 저녁에도 김수지 교수님은 너무 바빠 미안함을 전하며 잠시 얼굴만 보여주셨습니다. 연말이라 그런지 너무 바빠요. 속상할 정도로…. 그저 바쁘다고만 하셔도 될 텐데, 속상한 마음을 보여주시며 제 긴장을 툭 풀어주십니다. 그제서야 비로서 정년퇴임, 늙음 … 그리고 죽음을 함께 준비하고 맞이해야 하는 두 분의 사랑에 대해, 맞아야 할 이별과 죽음에 대해 가만히 여쭈어 보았습니다. 함께 마지막을 맞는다면 더 없이 좋겠지요. 하지만 누군가 한 사람은 먼저 가겠죠. 그러면 외로운 시절 혼자 살지 말고 다시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지요. 우리가 일생을 살고 나서 깨달은 가장 큰 비밀은 내가 이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혹은 이 사람이 나를 만났기 때문에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는 거예요. 다만 우리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에 이르기를 바라며 계속 성장해왔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나에게서 잘 훈련받았으니 다른 사람 만나면 더 잘 살겠지요하며 서로 장난스레 웃음을 물어가십니다. 당신의 사랑받는 아내 집을 나서며 30여 년을 사시고도 아직도 사랑을 느끼시느냐고 조심스레 묻습니다. |
# by | 2006/09/12 16:11 | Free_Story | 트랙백 | 덧글(0)
Happy Birthday to You!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시죠? 지난 번에 축하드렸지만 그것으로는 흡족지 못해 다시 씁니다. 이 글을 받았을 때는 이미 생일이 지났겠지만 생일 아침인 것처럼 읽어주세요. 오늘 한강에서는 스케이트 경기가 열렸습니다. 여러 소년 소녀들이 인수씨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빙판 위를 날고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으면서도 인수씨의 몇 번째 생일인지 모르고 있군요.
두 분의 삶을, 두 분이 함께 지녀 온 가치관을 아이들은 상처없이 받아들였냐는 조심스런 물음에 그러시더군요. 아이들은 부모의 앞에서 배우지 않고 부모의 뒤에서 배운다고, 부모의 말이 아니라 부모의 행동에서, 훈계가 아니라 삶의 발자국에서 배운다구요..jpg)



